초단국의 봉황, 팔풍(八風)을 타고 태어나다
고돌국의 왕궁이 삼팔광의 거대한 기운에 진동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산맥 너머 초단국의 성채 위에도 천지를 흔드는 기이한 현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초단국은 예로부터 화려함보다는 정교함, 파괴적인 일격보다는 판의 흐름을 단단하게 죄어오는 절묘한 수싸움으로 강호를 호령해 온 문무겸비의 나라였다. 특히 국호에서 알 수 있듯, 붉은 띠에 푸른 글귀를 새겨 넣거나 초목의 푸르름을 살려 판을 지배하는 ‘초단’의 무공은 그 기법이 매우 치밀하여 어설픈 화객(花客)들은 감히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한다고 전해졌다.
대낮에 닥쳐온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초단국의 왕궁 정전 위로만 내려꽂히던 붉은 빛의 기둥. 그 빛의 중심에서 별안간 백두산 삼림을 뒤흔드는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동서남북과 그 사이의 네 모퉁이, 즉 온 세상을 아우르는 여덟 방향에서 동시에 불어오는 기이한 바람, ‘팔풍(八風)’이었다.
팔풍이 왕궁 뜰을 스치자 뜰에 심어진 온갖 화초들이 거친 바람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일제히 한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새로이 태어날 절대적 존재에게 유교적 예법을 갖추어 절을 올리는 형국이었다.
"응아-! 응아-!"
마침내 초단국 왕비의 산실에서 맑고 청아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돌국 왕자의 울음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웅장한 뇌성(雷聲)이었다면, 초단국 공주의 울음은 귓가를 간지럽히며 뇌리를 맑게 깨우는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와도 같았다.
"공주님이시라! 궁주를 이으실 천목(天目)의 공주님이 태어나셨다!"
산실 밖에서 초조하게 경과를 기다리던 대신들과 무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아기를 품에 안고 나온 대비의 표정은 환희에 차 있으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전하, 이 아이의 눈을… 아이의 안광(眼光)을 보시옵소서!"
초단국의 왕이 갓 태어난 핏덩이 공주를 받아 들었을 때, 아이는 갓 태어난 아기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맑고 깊은 흑요석 같은 아이의 눈동자 속에는 기이하게도 세 가지 빛깔의 띠가 물결치고 있었다.
홍단(紅短)의 정열적인 붉은 빛, 청단(靑短)의 서늘한 푸른 빛, 그리고 초단(草短)의 고요한 초록 빛.
아이의 혜안(慧眼)이 한번 반짝일 때마다 궁궐 뜰에 휘몰아치던 팔풍이 정지하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꽃잎들이 마치 살아있는 패처럼 정갈하게 조화를 이루며 정렬했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모든 패가 가진 숨은 궤적과 상대의 손끝에 숨겨진 복선(伏線)을 읽어내는 ‘천리안(千里眼)’을 타고난 것이었다.
"세 가지 띠의 경지를 완벽하게 품고 태어난 봉황이라니…! 단 한 번의 눈짓으로 판의 길목을 차단하고, 상대의 숨통을 죄어올 초단의 절대자가 탄생했도다!"
초단국의 왕은 아이를 안아 들고 하늘을 향해 목놓아 외쳤다. 고돌국의 왕자가 거친 광(光)의 기운과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폭풍’이라면, 초단국의 공주는 판 전체의 혈류를 단숨에 짚어내고 통제하는 ‘지혜의 절세고수’였다.
태어나자마자 강호의 이치를 깨달은 듯 깊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공주의 손등에는 작은 붉은 반점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먼 훗날, 바닥에 깔린 모든 패를 한순간에 쓸어 담는 ‘판쓸이’의 신위가 발동할 때 거대한 진기를 견뎌낼 혈도(穴道)의 상징이었다.
백두산의 영기(靈氣)를 반으로 나누어 가진 두 태양.
한 날 한 시, 서로 다른 신비와 천명을 안고 태어난 고돌국의 왕자와 초단국의 공주. 두 사람의 탄생은 어두운 강호에 거대한 격랑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들이 훗날 만나게 될 화투판은 단순한 승패의 장이 아닌, 강호의 율법을 새로 쓸 전설의 시작점이 될 것이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백두산에 다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호의 고수들은 알고 있었다. 이제 막 거대한 전설의 첫 번째 패가 바닥에 던져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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